시를 쓰는 것을 우리는 창작한다고 쓴다.
이때 창작의 창(創)자를 살피면 그것은 상처를 나타내는 창(倉)이란 글자와 칼(刀)을 말하는
선칼도방(刂)으로 구성되어 있음을 본다.
이런 것으로 보아 시를 쓴다는 것은 칼로 상처를 내는 행위요,
시는 또 그 상처에서 피어나는 꽃이라고 볼 수 있겠다.
이를 좀 더 우리들 인생이나 시작과정에 빗대어 보면 다음과 같은 순서나 등식이 있음을 알게 된다.
칼 뒤에 외로움이 있고, 그 뒤에 그리움이 있고, 그 뒤에 실패가 있고,
그 뒤에 사랑이 있고 또 무엇 무엇들이 있다.
시(꽃)←상처←칼←외로움←그리움←실패←사랑←열정←소망(욕망).
그러나 사회적으로 잘 나가는 사람, 잘 사는 사람, 뽐내는 사람에겐 이런 정서의 구조가 없다.
그러므로 유식한 척 하는 시인들에게는 결코 좋은 시가 허락되지 않는다.
시를 쓰더라도 감동이 없는 시가 되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자신의 상처에 대해서 감사해야 하고 실패에 대해서도 곱게 감수하는 마음이 있다 한다.
이것이 바로 ‘승화’란 것이다.
그러나 요즘 우리들은 누구도 그렇게 하지 않는다. 요즘 우리들 세상은 헝그리의 시대를 넘어서 앵그리의 시대이다.
모든 사람들이 화가 나 있다. 티브이 어린이 프로를 보더라도 앵그리 버드란 것이 나와서 판을 친다.
새들도 화가 나 있는 것이다. 그렇게 화난 새들을 보면서 애기들이 자란다.
그러니까 사람들이 화가 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앵그리 보이, 앵그리 맘, 앵그리 영맨, 앵그리 그레이.
국민 모두가 화가 충만해 있다. 대한민국은 오늘날 화가 충만한 나라가 되었다. 이거 큰일이지 싶다.
왜 우리가 이렇게 되었는가? 우리가 그동안 ‘보다 빠르게, 보다 높게, 보다 넓게, 보다 크게, 보다 많이’를
인생의 목표로 삼고 살았기 때문이다.
그 결과 우리는 어떻게 되었는가? 과연 그것이 행복을 보장해주었는가? 아니다.
우리는 누구나 불행한 사람이 되었고 빈털터리가 되었고 누구나 외로웠고, 누구나 상처받은 짐승이 되었다.
그래서 지금 우리는 전 국민이 고통 받고 있고 신음하고 있는 것이다. 덫에 걸려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열패감이 문제이다. 열패감이란 무엇인가? 열등감과 패배감의 합성어이다. 이것이 큰일이다. 이대로는 안 된다.
친분 있는 의사한테 들어보면 찾아오는 환자들이 하나같이 화가 나 있고 도움을 주려고 해도 곧이곧대로 듣지 않고
의심하고, 자신이 나서서 이러니저러니 진단을 하고 처방을 하려고 한다고 한다.
그렇다면 왜 의사한테 오는가? 집에서 자기 혼자서 치료를 하지. 환자가 병원에 간다는 것은 의사의 도움을 받기 위해서
가는 것이다. 당연히 겸손해야 하고 부드러워야 하고 낮아져야 한다. 의사의 말을 신뢰해야 한다.
그래야 산다. 그래야 병이 낫는다. 그런데 그렇게 하지 않는 것은 사람들이 정서적으로 문제가 있어서 그렇다.
병이 들어서 그렇다. 몸이 아픈 것도 문제이지만 정신적으로 정서적으로 아파서 그렇다.
몸이 아픈 것보다 마음이 아픈 것이 더 큰 문제다.
오늘날 우리는 정신적으로 정서적으로 모두가 환자들이다. 그동안 우리가 잘못 살아온 결과이고, 증거이다.
(중략)
어찌해야 할 것인가? 치료가 필요하고 위로가 필요하고 휴식이 필요하고 돌아봄이 필요하다.
이쯤에서 과감하게 정지신호를 보내고 그것을 실행에 옮겨야 한다.
자기 자신을 용서하고 자신에게 있는 것에 만족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가난한 마음을 회복해야 한다. 가난한 마음이란 빈한한 마음이 절대로 아니다.
그것은 작은 것, 낡은 것, 오래된 것, 약한 것, 옛날 것, 값비싸지 않은 것, 흔한 것을 아끼고 사랑하는 마음이다.
그리고 주변에 있는 많은 이웃들을 사랑하는 마음이다. 일상의 발견이요 일상의 사랑이다.
다른 사람의 마음과 입장과 처지를 헤아려주고 이해해주고 또 같이 하는 마음이다.
이것이 바로 공자님이 말씀하신 인(仁)이요
석가님이 말씀하신 자비심(慈悲心)이요 예수께서 설파하신 긍휼히 여김이다.
이 시대는 종교조차 사악한 시대다. 종교인들도 상인이고 거짓 증언을 일삼고 자기유익만을 챙긴다.
결코 우리들에게 유익이 되지 않고 위로가 되지 않는다. 그 다음으로 우리에겐 만족할 줄 아는 마음이 중요하다.
노자 『도덕경』에서 보면 지족지지(知足知止, “만족할 줄을 알면 욕되지 않고 그칠 줄을 알면 위태롭지 않으니,
한없이 장구할 수 있다.〔知足不辱 知止不殆 可以長久〕『노자』제44장)란 말이 나온다.
지족이란 자기에게 있는 것에 만족하는 것이요, 지지는 멈출 때에 멈추는 것을 말한다.
간단한 문장이지만 이것은 참 어려운 일이다. 이걸 제대로 못해서 사람들은 더욱 크게 실패한다.
높은 사람, 잘 나가는 사람들, 학식 있는 사람들, 많은 것을 가진 사람들이 망신을 당하고 한꺼번에 무너진다.
이것만 제대로 실천할 수 있어도 성공한 인생이 된다. 지하철을 타다보면 ‘워츠 유어 스텝(Watch your step)’이라는
글자가 자주 나타나는데 우리야 말로 지금 자기 발밑을 진정 살펴야 할 때이다.
(중략)
여기서 필요한 것은 한 줄이라도 좋으니 우리에게 위로를 주고 권유를 주고 휴식을 주고 축복을 주는 문장이다.
정말로 그런 시가 필요하다. 우리는 오늘날 모두가 속빈 깡통이다가 찌그러진 깡통이다가 이제는 밟혀진 깡통 같은
납작해진 사람들이다. 그것은 어른들만 그런 것이 아니고 아이들도 그렇다.
그러기에 학교폭력이란 것이 나오고 왕따라는 것도 나온다. 이걸 세워야 한다. 그러나 마땅한 방법이나 처방이 없다.
이것이 문제다. 우선 나 자신을 찾는 길 밖에는 없다고 본다.
내가 정말로 괜찮은 사람이라는 생각을 해야 하고 쓸모 있는 사람이라는 생각을 해야 한다. 열패감에서 벗어나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타인을 보지 말고 자신을 봐야 한다. 내가 가진 것에 감사하고 내가 가진 것을
사랑하고 아끼고 소중히 여겨야 한다.
언제까지나 우리가 다른 사람이 가진 것만을 바라보며 부러워해야 할 것인가? 그래서(부러워해서) 한 가지라도
우리의 문제가 해결될 수 있으며 또 그것이 우리에게 행복이나 만족을 준다고 여겨지는가? 아니다.
받는 것은 열패감이요 끝내는 불행감이다.
이러한 마음의 고리를 끊어야 한다. 단박에 끊어야 한다. 나는 나다. 선언할 수 있어야 한다. 지금이라도 좋다.
이만큼이라도 감사하다. 나는 나다. 나의 것이 소중하다. 그러니 남의 것도 아껴주고 인정해주자.
그런 대 전환이 필요하다. 타인이 있어야 나도 있는 것이다. 내가 소중하니까 타인도 소중한 것이다.
그렇다면 나와 너는 둘이 아니고 하나이다. 이것을 또 알아야 한다. 내가 건강한 것은 너도 건강한 일이다.
내가 병들고 아프면 우주가 병들고 아픈 것이나 마찬가지다. 나는 아주 작은 나이지만 우주이기도 하다.
사랑도 필요이다. 필요해서 사랑하는 것이다. 유용해서 사랑하는 것이다. 필요하지도 않고 유용하지도 않으면
사랑하지 않는다. 부모와 자식의 사랑, 친구간의 사랑, 남녀 간의 사랑도 마찬가지다.
내가 너에게 필요하고 네가 나에게 필요하니까 사랑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상호간 필요한 사람,
유용한 사람이 되도록 노력해야 한다. 우리 자신이 진정 필요한 존재이고 유용한 사람들임을 깨달아야 한다.
내가 우리 부모에게 얼마나 필요한 사람이고 유용한 사람인가? 그것을 생각하고, 그것을 깨달을 때
우리는 문득 눈물이 나기도 할 것이다. 내가 죽었다고 생각할 때 우리 부모는 얼마나 슬퍼하고 애통할 것인가?
그걸 생각하면 나의 삶의 하루하루가 더욱 소중해지고 경건해질 것이다.
여기에는 자기만족이 선행되어야 한다. 달라이 라마 같은 분은 이렇게 말했다. “탐욕의 반대는 무욕이 아니라 만족이다.”
얼마나 좋은 감사한 말씀인가! 이것은 종교를 넘어서 우리 인생에서의 구원의 말씀이다.
나 자신 이 말씀을 듣고 노년의 욕망과 어리석은 사랑에서 구원을 받았던 적이 있다.
이쯤에서 요구되는 것이 우리들의 시이다.
오늘 날 시의 시대가 끝났다고 말하지만 그것은 결코 그런 것이 아니다. 시인들이 감동 없는 시를 써내서 그렇지
시의 시대는 결코 끝나지 않았다. 시인들이 자기들만 아는 시를 쓰고 자기들만의 언어잔치를 하기 때문이다.
독자들에게 유용하지 않고 필요하지 않은 시를 쓰기 때문이다. 우리가 왜 『논어』를 읽고, 『성경』을 읽고,
『노자』를 읽고 달라이 라마의 『행복론』을 읽고, 소로우의 『월든』을 읽는가? 유익하기 때문에 읽는 것이고,
필요해서 읽는 것이요, 위로가 있기 때문이요, 인생의 지침이 되기 때문에 우리에게 길을 보여주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
대답은 오히려 간단하다. 시인들이 독자들에게 필요한 시, 유용한 시를 쓰면 된다.
자기들만 좋아서 지껄이는 시를 쓰지 말고 다른 사람들에게도 알아들을 수 있는 시를 써야 하고
그들에게 감동이 되는 시를 써야 한다.
우리 시사에서 이상이란 시인은 이상 한 사람으로 족하다. 오늘날도 많은 사람들은 시를 원하고 있다.
어떤 시를 원하고 있는가?
분석해야 알고 해설을 붙여야 이해가 가는 시를 원하는가?
아니다. 직구를 말리듯 다이렉트로 들어오는 시를 원하고 있다. 생활 가까이 우리들의 이야기를 쓴 시를 원하고 있다.
우리들의 한숨, 우리들의 문제, 우리들의 고달픔, 슬픔, 원망, 소망, 안타까움, 그런 것들을 담은
솔직하고 친근하고 따뜻하고 부드럽고 거만하지 않은 시를 원하고 있다.
보통사람들의 평범한 일상의 시를 원하고 있다. 정말로 그것은 분명하다. 그러기에 시인들은 지나치게 특수 쪽으로 나가면
안 된다. 자신을 특별한 사람, 선택 받은 사람이라고 여겨서도 안 된다. 그것은 시인의 불행이고 독자의 불행이다.
시인도 보통 생활인과 똑같은 사람으로서 인생의 동행인이 되어야 하고 감정의 이웃이 되어야 한다.
시인 자신이 까다로운 사람, 지체 높은 사람, 특별한 사람이 되지 않으려고 노력해야 한다.
그래야 독자들과 감정이입이 일어나고 또 감동 있는 시를 쓸 수가 있다.
시인들에게 권한다. 높이 올라가지 말고 내려오라. 산속으로 들어가려 하지 말고 시정 속으로 내려와라.
자신이 대단하거나, 특별한 사람이라고 착각하지 말라. 당신은 어떤 면에서는 수준 이하의 사람일 수도 있다.
그것을 알아야 한다.
그런 다음에 다시금 당신의 시를 출발시켜라. 당신은 결코 감정의 귀족이 아니다. 만약 그렇게 생각한다면
거기서부터 벌써 실패다. 당신은 망한 나라의 군주다. 고대 인도의 카비르(Kabir) 같은 사람은 일생을 시장바닥에서
물을 긷고 베 짜는 사람으로 살면서 훌륭한 해탈을 이루었고 너무나도 아름다운 깨달음의 시를 남겼다.
여기서 다시금 창작(創作)의 창(創)자에 대한 생각을 해보게 된다.
시는 상처의 꽃이다.
인생살이를 하다가 받는 온갖 상처의 꽃이다.
그 꽃 뒤에는 칼이 있고 그 뒤에는 외로움이 있고 그 뒤에는 그리움이 있고
다시 그 뒤에는 실패가 있고 그 뒤에는 사랑이 있고 사랑 뒤에는 열정이 있고 다시금 그 뒤에는 어리석은
우리네 인간의 욕망 내지는 소망이 있다.
아, 이를 다시금 어찌할 것인가? 그러기에 우리는 다시금 인간이고 다시금 위로와 축복과 치유가 필요한
안쓰러운 인간들이다.
독자와 소통하는 시, 감동이 있는 시를 쓰기 원하는 사람들이여!
외로움 없이, 그리움 없이, 실패 없이, 사랑 없이 시를 쓰려고 하지 말라. 시는 진정 상처의 꽃이다.
이걸 꿈에서도 잊지 말라.